
등화가 꺼진 바다
1909년 7월 27일, 할로(Harlow)호의 갑판에서 누군가가 어둠 속 바다를 바라봅니다. 앞서 긴 연기를 뿜던 증기선이 있던 방향입니다. 밤이 깊자 그쪽에서 밝은 섬광이 두 차례 번뜩입니다.
이어 등화가 사라집니다. 할로호 선장은 새 배가 심각한 이상 없이 그렇게 많은 연기를 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바다에 있던 배가 SS 워라타호였는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난파선이 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08년, 새 배가 물에 닿다
1908년 9월 12일, 워라타호(SS Waratah)가 진수됩니다. 블루 앵커 라인(Blue Anchor Line)을 위해 건조된 이 여객·화물 증기선은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 항로를 운항하도록 설계됐습니다.
한 기록은 1908년 10월 23일을 완공일로 남깁니다. 이어 1908년 11월 5일, 워라타호는 첫 항해를 시작합니다.
20시 15분, 더반의 불빛 뒤로
1909년 7월 26일 20:15경, 워라타호가 더반(Durban)을 떠납니다. 목적지는 케이프타운(Cape Town)입니다. 배 안에는 승객과 승무원 등 모두 211명이 타고 있습니다.
다음 날인 7월 27일 04:00경, 클랜 매킨타이어(Clan Maclntyre)호가 워라타호를 목격합니다. 06:00경 두 배는 신호등을 통해 선박명과 목적지 정보를 주고받았다는 항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09:30경, 워라타호는 클랜 매킨타이어호를 앞질러 갑니다. 배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집니다. 이후 마지막 확정 목격 뒤 24시간 동안 날씨는 급격히 나빠지고 바다는 매우 거칠어집니다. 클랜 매킨타이어호 선장은 13년의 해상 경력 가운데 가장 험한 날씨였다고 적었습니다.
연기, 섬광, 그리고 T-A-H
같은 7월 27일, 할로호는 연기를 내는 증기선 한 척을 봅니다. 어두워진 뒤 그 선박이 있던 방향에서 밝은 섬광이 두 차례 나타납니다. 이어 그쪽의 등화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21:30경, 북쪽으로 항해하던 겔프(Guelph)호도 다른 선박과 등불 신호를 교환합니다. 그러나 악천후와 낮은 가시거리 속에서 확인된 것은 선명 끝 세 글자, ‘T-A-H’뿐이었습니다.
7월 29일은 워라타호의 케이프타운 도착 예정일입니다. 항구는 배를 기다리지만, 워라타호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예인선
1909년 8월 1일, 예인선 T.E. 풀러(T.E Fuller)가 첫 수색을 시작합니다. 악천후가 길을 막자 예인선은 항구로 돌아옵니다.
8월 13일, 인시즈와(Insizwa)호는 움바사강(Mbhase River) 하구에서 여러 구의 시신을 목격합니다. 그해 9월, 블루 앵커 라인은 탐조등 등을 갖춘 사빈(Sabine)호를 다시 수색에 투입합니다. 사빈호는 흔적을 찾지 못합니다.
그 뒤 수십 년이 흐릅니다. 1983년 이후 국립 수중·해양 기구(NUMA)는 워라타호를 찾기 위해 아홉 차례 탐사를 실시합니다. 1987년 9월에는 남아프리카 동해안에서 다시 탐사를 벌입니다.
발견 발표가 남긴 빈자리
1999년 7월 14일, 해양 탐험가 에믈린 브라운(Emlyn Brown)은 이스턴케이프(Eastern Cape) 연안에서 워라타호 난파선 위치를 발견했다고 발표합니다. 당시 브라운은 약탈을 우려해 정확한 위치를 공개하지 않았고, 강한 해류와 수심 탓에 통상적 잠수 장비로 접근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2001년 1월 17일, 브라운은 1999년에 워라타호로 식별했던 난파선이 1942년 유보트(U-boat)에 침몰한 군수품 운반 화물선이라고 발표합니다. 90년 동안 이어진 실종의 답처럼 보였던 선체는 워라타호가 아니었습니다.
나란히 놓인 장면들
- 워라타호는 1909년 7월 더반을 떠난 뒤 승객과 승무원 211명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 마지막 확정 목격 뒤 24시간 동안 날씨가 급격히 악화됐고, 바다는 매우 거칠었습니다.
- 할로호가 본 증기선은 많은 연기를 냈습니다. 그 방향에서는 밝은 섬광이 두 차례 나타난 뒤 등화가 사라졌습니다.
- 겔프호는 등불 신호를 교환한 선박에서 ‘T-A-H’ 세 글자만 읽었습니다.
- 1999년 워라타호로 발표된 난파선은 2001년, 1942년에 침몰한 다른 화물선으로 판명됐습니다.
파도 아래로 끌려간 배
주장자가 밝혀지지 않은 한 해석은 남아프리카 연안의 이례적으로 큰 파도가 워라타호를 침몰시켰거나, 배가 방향타를 잃어 조난했다고 봅니다. 마지막 목격 뒤의 폭풍과 거친 바다, 그리고 배가 갑자기 사라진 일을 한 줄로 잇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난파선의 위치나 직접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견해는 워라타호가 괴파(freak wave)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1999년 발견 발표에서 난파선이 똑바로 해저에 놓여 있고 빠르게 가라앉은 듯 보였다는 설명과 맞물렸습니다. 하지만 그 난파선은 2001년 다른 선박으로 밝혀집니다.
이름이 남지 않은 또 다른 주장은 선적된 납 약 1,000톤과 가루 형태 철광석 약 300톤에 주목합니다. 선박 운동으로 화물이 액상화해 한쪽으로 쏠렸고, 배가 안정성을 잃어 전복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폭풍 속 급격한 전복과 침몰을 설명하지만, 워라타호의 침몰 상태를 보여 주지는 못합니다.
소용돌이에 휘말렸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흔적 없이 사라진 배를 설명하려 하지만, 이 역시 실제 선체가 어떤 모습으로 가라앉았는지는 말해 주지 못합니다.
할로호 장교들은 폭발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두 차례의 밝은 섬광과 그 뒤 사라진 등화를 설명하는 해석입니다. 다만 그들이 바라본 증기선이 워라타호였는지, 그 바다 밑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는지는 이 주장만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바다 밑에 남은 이름
끝내 확인되지 않은 것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워라타호의 실제 난파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원인으로 침몰했는지, 1909년 7월 27일 할로호와 겔프호가 본 배가 워라타호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괴파였는지, 화물 이동이었는지, 소용돌이였는지, 폭발이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워라타호는 211명과 함께 사라진 채 남아 있습니다. 두 번의 섬광 뒤 꺼진 등화는, 과연 어느 배의 마지막 불빛이었을까요?



